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거짓말쟁이 마크 트웨인 인종주의를 향한 촌철살인의 재담과 풍자
‘미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미국의 셰익스피어’ ‘문학의 링컨’ 등으로 불리는 마크 트웨인의 후기작 [얼간이 윌슨] 은 노예제 전성기 시절의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미국사회의 부조리를 대가다운 번득이는 재담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허클베리 핀의 모험] 과 같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작은 아니지만, F. R. 리비스 같은 평론가는 ‘무시당한 걸작’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고전’으로 꼽으면서, 이 작품만으로도, 또 트웨인의 다른 대표작들과 연결 지어 보아도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걸작이라 평한 바 있다. 중편 정도의 길지 않은 분량에, 미국 남부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로 시작해 후반부로 가면서 탐정소설 분위기로 전환되는 이 작품은, 미국의 역사와 노예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한편 에드거 앨런 포우 이래의 추리소설 전통에도 닿아 있는 독특한 작품이다. 또 각장 서두에 ‘얼간이 윌슨의 책력(冊曆)’이라는 허구의 문서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아이러니한 경구를 섞는 등 마크 트웨인 특유의 신랄함과 유머가 곳곳에서 발휘되며 ‘가장 위대한 문학 사기꾼’의 원숙함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사실주의적 묘사를 아이러니와 풍자가 살아 있는 입담으로 풀어내 가볍게 읽어내기에도 어려움이 없어 청소년들을 위한 권장도서로 널리 채택되고 있으며, 미국사회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담은 고전적 성과로 꼽힌다.
뒤바뀐 아이, 이국에서 온 쌍둥이, ‘얼간이’ 변호사...... 남부 소읍을 덮친 한바탕 범죄와 소동
윌슨은 남부 소읍 도슨스랜딩에 옮겨온 첫날, 한마디 농담으로 순식간에 전도유망한 변호사에서 ‘얼간이’가 되어버린다. 공인된 ‘얼간이’로 전락한 윌슨은 소일거리로 손금 보기와 지문 수집을 하며 무료한 삶을 살아간다. 한편 고귀한 집안의 가내노예인 록시는 겉보기에는 백인과 아무 차이가 없는, 핏줄의 ‘16분의 1’이 흑인인 여인이다. 어느날 록시의 주인집에서 소소한 절도사건이 발생하고, 주인은 노예들을 모아놓고 남부 더 깊숙한 곳으로 팔아버리겠다는 협박으로 자백을 종용한다. 이 사건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낀 록시는 ‘32분의 1’ 흑인인 자신의 갓난아기와 같은 날 태어난 주인집 아이를 바꿔치기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뒤바뀐 록시의 아이 ‘톰’은 과보호 속에 방탕을 일삼는 망나니로 자란다. 그러던 어느날 이 작은 마을에 이딸리아 귀족인 쌍둥이가 나타나고, 도박 빚에 쪼들리던 톰이 동네의 집들을 털며 돌아다니게 되면서, 온 마을은 신기한 이방인과 연쇄절도로 흥분에 휩싸인다. 크고 작은 좌충우돌 소동 끝에 제집을 털려던 톰이 우발적으로 자신을 키우고 돌봐주던 숙부를 살해하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쌍둥이 이방인들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쌍둥이 측 변호인으로 나선 윌슨은 뭇사람의 비웃음거리였던 수집된 지문들을 활용해 사건 해결에 나선다.
‘미국 현대문학의 아버지’ 마크 트웨인 미국 역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 성찰
[얼간이 윌슨] 은 흑인 노예와 주인집 백인 아이가 뒤바뀔 수 있었던 록시와 톰의 출생 배경에서 드러나듯, 흑인과 백인 간의 성적 관계라는 당시로서는 민감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작품이 발표된 19세기 말 미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인종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했고, 작가로서 확고한 명성을 다진 마크 트웨인이라고 해도 그러한 주제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것은 상당한 위험을 무릅쓰는 시도였다. 소설은 남북전쟁 이전인 1830년대에서 1850년대에 이르는 시기의 남부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는데, 작품이 발표된 1894년은 남북전쟁이 끝난 지 삼십년 가까이 되는 때로, 노예해방 이후에도 인종문제를 해소하지 못한 채 남부에서는 반동의 물결이 고조되고 북부에서도 사회통합에 실패한 시기였다. 마크 트웨인은 이러한 때에 노예제 전성기의 미국 남부로 돌아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법과 관습이라는 허구에 따라 깜둥이""인 록시와 톰의 이야기를 통해 미국사회의 치명적인 환부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면서 이 작품은 인종주의라는 미국 역사의 핵심적 모순을 통해 미국사회 전반을 비판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는 ‘고귀한 백인 핏줄’을 타고난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당시 세태를 다루는 데서도 드러나는데, 뒤바뀐 아이 ‘톰’의 숙부이자 일급 가문의 일원인 드리스컬 판사와 그의 친구인 펨브로크 변호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도슨스랜딩의 ‘으뜸 시민’으로서 미국식 가치를 체현하는 인물들인데, 톰의 방탕을 실질적으로 제어하지도 못하며, 일련의 소동 속에서 그에 합당한 합리적 판단력이나 도덕의식을 보여주지도 못한다. 도슨스랜딩이라는 지역사회 역시 오락가락하는 여론에 휩쓸리며 공론의 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모습을 보여, 민주주의와 합리성,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라는 미국식 질서에 대해 여러가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에 반해 노예 록시와 북부 출신인 ‘얼간이’ 윌슨은 그들 역시 시대적 한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는 허점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이끌어가는 두 중심으로서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인물상을 보여주며 백인 상류층이나 지역사회 주류와 대비를 이룬다. 이 작품의 평가를 둘러싸고, 노예제의 비극적 현실을 다루다가 살인사건의 진범을 찾는 추리소설로 작품 분위기가 바뀌는 것이나, 대안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 점, 스스로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마땅한 결론을 맺지 못하는 점 등은 논쟁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는 당대사회의 한계가 플롯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이후 작가들에게 더 치밀한 문학적 탐구를 요구하는 훌륭한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미국 역사의 과오와 그 폐해를 탁월하게 지적해낸 문학적 가치는 결코 낮게 평가될 수 없을 것이다.
역자의 말
[얼간이 윌슨] 은 미국의 노예제 문제와 미국 역사의 실상에 대한 근본적 성찰을 담은 고전적인 성과로 꼽힌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남북전쟁 이전인 1830년대에서 1850년대에 걸쳐 있고, 발표된 때는 남북전쟁이 30년 가까이 지난 후이다. 작품이 발표된 1890년대는 남부에서 반동의 물결이 최고조에 달했으며, 북부 역시 진정한 통합과는 거리가 먼 상태였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작가가 노예제 전성기로 돌아가 겉모습은 백인이지만 법적, 사회적으로는 흑인인 록시와 톰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것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이 작품에는 인종문제의 핵심을 찌르기는 했으되 그것을 해결하는 구체적 방향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트웨인의 한계, 더 정확히는 당대 미국사회의 한계가 어떤 식으로든 반영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의 작가들에게 자신이 미처 다하지 못한 문학적 탐구를 요구하는 동시에 그러한 후속 작업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점에서 [얼간이 윌슨] 의 탁월함은 오래도록 빛을 발할 것이다. - 김명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