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 ‘철학의 정원’의 열아홉 번째 책. 하이데거 연구자인 박찬국 교수의 [존재와 시간] 해설서로서 [존재와 시간] 의 문맥을 세세하게 읽으며 철학 입문자들의 하이데거 이해를 돕고자 하는 취지에서 출간되었다. 어렵기로 정평이 난 마르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한글로 된 좋은 번역본이 이미 있지만, 독일어와 한글 사이의 언어적 차이와 하이데거 특유의 난해한 표현들이 이해를 어렵게 한다. 이 책의 특징은 [존재와 시간]의 목차와 내용 전개를 그대로 따라가며 하이데거의 문장들을 거의 그대로 독해해 나간다는 점에 있다. 일반적인 입문서들이 내용의 핵심만을 요약하는 데 반해 이 책은 [존재와 시간]을 직접 읽기 위해 그 문맥과 개념의 흐름들을 하나하나 세밀하게 읽고 해설해 나간다. 무엇보다 하이데거 연구의 대표자 중 한 명인 박찬국 교수의 정교한 해설이 신뢰를 준다.
강독의 형식으로 세밀하게 다시 읽는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의 사유 맥락을 돌아보며 [존재와 시간]을 다시 읽는다!!
세기말의 허무주의와 세계대전의 대혼란을 경유하며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골몰한다.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존재양식이란 무엇일까, 무엇이 인간을 나무나 돌이나 기계와는 다른 무엇으로 만들어 주는가. 격변기는 사유의 단절을 낳는다. 하이데거는 고대 그리스의 존재론 이후 서양 형이상학에서 망각되었던 ‘존재’의 물음을 다시 시작하고자 한다. 그린비출판사는 ‘철학의 정원’ 열아홉 번째 책으로 박찬국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강독]을 출간했다. 난해하기로 소문 난, 그리하여 독일인들조차도 읽기 힘들다는 하이데거의 대표작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 1927)은 이미 20세기 존재론의 틀을 규정지은 고전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 문체의 독특함과 개념의 새로움으로 인해 독자들에게 이 고전이 충분히 이해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국내 하이데거 연구의 대표자 중 한 명인 저자의 이번 책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친절한 독해로 철학입문자들의 하이데거 이해를 가능케 할 길을 트고자 했다는 점에 있다. 입문서들이 해설 대상이 되는 원전의 요지만을 뽑아내어 설명하기에 원전의 세밀한 핵심에 가닿을 수 없다는 점, 번역서들이 해당 언어의 특이성을 살려 내기 힘들다는 점을 고려해 저자는 강독의 형식으로 하이데거의 문제의식과 개념들을 충실히 설명하고자 한다. 강독 형식의 세밀한 독해와 친절한 해설을 통해 난해한 [존재와 시간]이 이제 대중 독자들의 사유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하이데거의 철학적 물음의 핵심은 ‘존재’란 무엇이며, 어디로부터 오는가로 규정할 수 있다. 기계문명이 인간소외와 전쟁의 압도적인 공포감을 낳은 시대, 세간의 여론이 사유의 정교함을 가로막기 시작한 시대에 하이데거는 망각된 인간 현존재(Dasein)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인간 현존재는 무엇보다 돌이나 낙엽, 흙이나 자갈과는 다른 무엇을 갖는다. 그것은 날아다니는 새도, 헤엄치는 고래도 가질 수 없는 것을 그 존재양식에 갖고 있다. 하이데거는 인간 현존재와 다른 존재자들을 구분하는 이 가장 근원적인 핵심을 ‘세계’(Welt)라 부른다. 오직 현존재만이 세계를 가지며, 의미의 총체인 이 세계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이 일정한 가능성으로서 던져져 있다는 것, 소외된 삶으로부터 자신의 본래적 존재양식에 답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독자들은 이러한 하이데거의 사유를 따라가며 이 책의 친절한 개념 해설을 매개로 마음씀, 죽음, 불안, 양심, 시간성 등의 현상학적 개념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존재물음의 의의와 개념들
[존재와 시간]의 문장들을 그대로 따라가듯 읽으며 뜻을 풀이하는 이 책에서 독자들이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은 하이데거가 왜 존재의 물음을 던지는가 하는 점이다.
‘세계’의 개념과 ‘현존재’ 근대철학의 서막을 연 이로 많은 이들이 르네 데카르트(Ren? Descartes)를 꼽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유명한 명제와 더불어 부상한 근대철학의 화두에서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에게서 설명 없이 단언된 ""존재한다""라는 언명이 오히려 설명을 필요로 하는 존재론의 핵심화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숨 쉬고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떤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일까? 나는 직장인으로도, 제3세계인으로도, 혹은 동물로도, 식물로도 존재할 수 있다. ‘존재한다’라는 것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문제는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존재의 방식에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물음이 과녁을 겨누는 지점은 바로 이 인간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에 있다. 먼저 이를 위해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두 개의 개념이 있다. 하나는 ‘눈앞의 존재’(Vorhandensein)이고, 다른 하나는 ‘도구적 존재’(Zuhandensein)다. 눈앞의 존재란, 우리 앞에 존재하는 수많은 낱낱의 사물들과 실체들의 존재방식을 일컫는다. 거리의 나무들, 하늘 위의 구름들은 모두 낱낱의 사물들로 존재한다. 그것은 이 세계에 주어져 있는 것이지만, 그 주어져 있음 외에 어떤 것도 우리에게 더 전달하지 않는다. 한편, 책상 위의 볼펜, 거리의 자동차들은 인간 현존재의 활동을 매개하는 도구적 존재로 존재한다. 반면, 인간은 언제나 일정한 관계망과 의미의 연쇄적 고리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는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種)임과 동시에 사회적 관계망 내의 위치에 의해 그 존재방식이 규정되는 존재자이다. 부르주아로서, 나치스로서, 제3세계의 노동자로서, 그리고 성소수자로서 나는 존재한다. 그 각각의 존재방식은 다른 현존재들의 존재방식을 규정하는 '세계'의 한 관계망을 형성한다(오늘날 부르주아는 프롤레타리아를, 제3세계인들은 제1세계인들을 전제한다). 요컨대, 인간 존재자들은 그 존재방식 자체에서 자신들의 시대적 조건과 그 의미를 표현하게 된다. 이러한 시대적 조건과 의미의 총체를 하이데거는 ‘세계’라고 불렀다. 인간은 언제나 ‘세계’ 속에 존재하며, 따라서 자신의 존재 조건 자체에서 그 시대의 한계 및 가능성과 마주하게 된다. 이때 ‘현존재’(dasein, 現存在)의 ‘현’(da)이 ‘거기에’를 뜻함과 동시에 ‘나타나다’를 뜻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존재는 ‘세계’라는 ‘거기’에 던져져 있음과 동시에 그 세계의 가능성으로서 현현할 수 있다.
‘세상 사람’과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방식 이렇듯 세계 속에 존재하는 현존재는, 그러나 일상에 있어서는 소외된 방식으로 존재하게 된다. 20세기 초 군중의 거대한 움직임을 본 하이데거는 개별의 현존재들이 자신들의 단독자적 존재방식을 잃은 채 살아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때 하이데거가 단독자성을 잃은 인간 현존재를 지칭하는 개념이 바로 ‘세상 사람’(das Man)이다. 역자에 따라서 ‘세인’이나 ‘그들’로 번역되기도 하는 이 개념은 자신의 존재가능성을 스스로 잃은 채 살아가는 현존재의 비본래적 존재방식을 지칭한다. 반면, 본래적 존재방식이란 현존재가 자신의 한계를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그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기재(旣在)의 것들에 묶여 자신의 가능성을 잃은 채 살아가는 현존재의 현재는 가능성을 향해 열린 장래를 향해 현존재가 스스로를 던질 때 비로소 극복될 수 있다. 이때 ‘장래’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의 미래가 아니다. 장래는 시계추의 흐름 속에서 다가오게 되는 기계적 시간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신의 가능성을 향해 달려갈 때 선취할 수 있는 실존적 시간의 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현존재의 단독자성의 회복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하이데거가 주목하는 또 다른 개념들이 바로 ‘죽음’과 ‘불안’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죽음은 결코 생물학적인 의미의 죽음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재의 삶에 가해진 종언이며, 따라서 현존재가 기존의 삶과 결별하게 되는 존재방식의 경계지점과 같다. 이 존재방식의 경계지점과 마주하며 현존재가 느끼는 것이 불안이다. 세계 속에 던져져서 그 세계의 물음을 자신의 물음으로 받아안는 현존재에게 기존의 익숙한 모든 것과의 결별을 암시하는 이 과정은 곧 불안의 엄습이라는 형태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나 바로 이 불안의 정서가 현존재의 존재가능성을 열어주는 기분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세계와의 단독자적인 조우는 곧 현존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열린 불안의 기분을 야기한다..
강독의 형식으로 하이데거를 읽는다는 것
인간의 존재방식으로부터 그 존재방식에 의해 느끼게 되는 정서와 존재방식의 경계들을 포괄적으로 조명하는 [존재와 시간]은 그 자체로 거대한 사유의 세계를 담아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수많은 세계의 학자들이 [존재와 시간]에 대한 해설과 연구를 시도해 왔고, 한국에서도 수많은 논문과 입문서들이 출간되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존재와 시간]에 대한 많은 입문서들은 대체로 원전의 핵심적 내용을 요약하는 경향이 있었기에 하이데거의 개념 전개가 보여 주는 세밀한 사유의 세계를 제대로 전달해 줄 수 없었다. 한글과 독일어 사이의 어감과 문장구조 차이가 만들어 낼 수밖에 없는 의미 전달의 오차 역시 [존재와 시간] 번역본의 이해를 어렵게 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하이데거의 문장을 그대로 따라가며 개념 전개의 맥락을 세밀히 비춰 주는 본서의 출간은 그 의의를 새롭게 한다고 할 것이다. 강독의 형태로 [존재와 시간]을 독해해 간 본서의 내용 전개는 하이데거 입문자들에게 하이데거의 세밀한 개념 흐름을 보다 쉽고 명료하게 포착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접어보기 목차 본문중에서 |